보고 싶었던 것
비가 오는 날이었다.
그저 얼른 집에 가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어쩌다 이런 전개가 된 것인지. 젖은 옷자락을 꾸욱 쥐며 그저 서 있는 여자의 건너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지만, 여자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도망가야 해. 도망을, 도망을…… 그렇게 웅얼대는 것은 생각 뿐이고, 사실 입은 열고 있지도 않다는 것도 모른 채였다.
"……가씨. 아가씨."
"히, 히익!"
"……계속 부르고 있었건만. 너무 놀라는구먼?"
아무리 불러도 정신을 차릴 기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계속 울리던 목소리의 주인은 멍하니 바닥만 쳐다보며 서 있던 아가씨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당연히 넋이 나가있던 아가씨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목소리의 주인, 레이는 그저 가볍게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긴장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네만…… 안즈 아가씨."
"……."
"어쨌든, 그 옷은 갈아입는 게 낫겠지. 자, 착한 아이니까 선배가 말하는 대로 따라줬으면 좋겠는데…… 욕실은 저 쪽이고, 갈아입을 옷은 욕실 앞에 놔 뒀으니 들고 들어가면 될 게야."
"아, 고, 고맙……"
습니다. 거기까지 말을 잇지 못한 안즈는 잠시 들었던 고개를 다시 떨궜다.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선배의 집에서, 이런 호의를 받고, 마치 학생 시절처럼…… 거기까지 생각한 안즈는 입술을 물었다. 그런 감정 같은 건 이제 없어졌다고, 드러내지 못할 마음이라면 필사적으로 숨기자고. 그렇게 버티고 묻어온 시간이 무색하게도, 지금 안즈가 느끼는 감정은 설렘이었다. 두근거림이었고, 긴장이었다.
"……."
그런 안즈를 찬찬히 바라보던 레이 역시 차분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저 조그만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지는, 아주 뻔한 일이다. 이런 신세를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지. 하지만 레이는 포기해 줄 생각이 없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사랑스런 후배가 감기에 걸리는 것이 염려되어서.
"아가씨는 변한 게 없구먼. 몇 년 만나지 못했다고 이 몸이 아가씨를 모를 리가 없는데 말이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 어른이에요."
"뭐어, 어른이 아니라고 한 적은 없지만."
레이가 안즈의 머리를 살짝 쓸어준 뒤 조용히 웃었다. 어른이면, 제 몸은 알아서 지킬 줄 알아야지…… 내리는 비를 쫄딱 맞으며 타박타박 걸어가던 발걸음이 떠올라 혀를 차고 싶은 심정이 되었지만, 그 잔소리는 조금 미뤄두기로 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선배도 변했을 거고…… 저도 변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사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건데……."
"……."
"안 되겠어요. 일단 돌아갈게요. 전국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아이돌의 집에서, 일단 지금은 평범한 대학생인 여자애가 단 둘이 있었다는 거…… 원래는 없어야 할 일이잖아요."
물방울은 여전히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저런 꼴을 해서는, 다시 저 장대비 속으로 돌아가겠다고? 레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안즈는 그 심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본인의 감정을 다스리기에도 벅찼던 탓에.
안즈의 눈이 깜박였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필사적으로 눈에 힘을 주고 있는 모습은 저 사람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보고 싶었다. 직접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왕 그렇게 지나버린 것, 평생 추억으로 묻어놓은 채 지내고 싶었다. 그런 이유에서 레이의 향기로 가득한 이 공간은 너무 위험했다. 도망쳐야 했다.
"말을 바꾸지."
하지만 일이라는 것은, 모두 의도한 대로 풀리는 것만은 아니었던가.
"이건 긴장할 일이야. 사실 정말 아무 짓도 안 할 생각이었지만…… 모처럼 온 기회를 놓치는 멍청한 짓은 한번으로 족하니까 말이네."
"……?"
진짜 이유는, 지나간 시간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고 싶어서.
"안즈."
"……!"
옥상의 그때 그 시간처럼 부르는 목소리에 안즈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 떨림을 느꼈는지 레이도 굳었던 표정을 풀고 살풋 미소지었다. 도망치려고 했겠지만, 이미 늦었다. 살며시 들리는 고개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있었고, 레이는 그 감정들을 어느 정도 읽어냈다. 마음이 표정에 훤히 드러나는 이 아이에 대한 것은 여전히 너무 잘 알았다. 그리고 무엇 하나 잊지 않았다.
"싫다면…… 거절해도 좋아."
안즈의 턱이 들렸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 압력에 눈이 동그래진 안즈가 무엇을 말할 새도 없이, 레이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 멍한 머리는 그저 눈 앞에 있는 날카로운 눈매를 보고서도 굳어있기만 했다.
"허락으로 알아듣겠어."
"……자,"
겨우 뗀 입술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완성되지 못한 말은 눈을 감은 레이의 입술 안으로 사라져 버렸고, 아직 젖어있는 블라우스가 감긴 허리를 움켜쥐는 손길에 안즈의 눈은 커지기만 했다. 거짓말. 이런 거 거짓말이야. 거짓말……
"흐읍……"
"……."
울음이 터졌다. 의지가 아니었는데, 그냥 그렇게 터져나온 눈물이 안즈의 볼을 타고 흐르자 레이가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안즈가 입술을 양 손으로 막았다. 울망한 눈동자와 마주친 약간 흐려진 눈동자가 죄책감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안즈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왜, 왜 이런. 왜 그런 눈을. 자세히 생각하기 싫었지만, 한구석에 피어나는 기대감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인지. 안즈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서?"
"……왜, 왜 이런……"
"싫은가?"
"그 전에……"
"안즈."
또다. 단호하게 들려오는 제 이름에, 안즈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아, 이 사람한테는 평생 이기지 못 할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울먹였다. 왜 이런 일이 생겼지.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평범한 일상이었다. 평범한 생활이었고, 아이돌 몇의 연락처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만 빼면 나름 평범한 신분이었다. 그런데 왜.
"내가…… 싫은가?"
곧게 뻗어오는 붉은 시선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거짓말……
씁쓸한 레이의 표정이 안즈의 눈에 비치자 안즈는 무너져 내렸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 선배가 날 좋아한다거나, 그런 것…… 전혀 상상해보지 않았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여기고, 그렇게, 후배로서 살아온 나날이었다. 선배에게는 그저 추억이겠거니 하고 산 날들이었다.
"그럴, 리가……"
"……안즈?"
한계였다. 안즈의 벽이 무너짐과 동시에 레이의 품에 조그만 체구가 들어왔다.
"좋아해…… 좋아해요."
"……."
"너무 좋아한단 말이야……."
레이의 품으로 뛰어든 안즈는 그저 울었다. 숨막히게 울기만 해서, 가슴팍을 적시는 눈물을 느끼며 서 있던 레이가 팔을 뻗었다. 그리고 이 작은 아가씨를 온 힘을 다해 껴안아 주었다.
"그래, 안즈……"
그 날도 울었었지. 이렇게까지는 아니었지만. 그 날도 비를 맞고 있었지…… 스쳐지나가는 기억들에 레이의 고개가 다시 숙여졌다. 비는 내리지만, 이제부터의 시간은 헛되게 보내지 않을 거다. 그렇게 속삭인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데려온, 비가 오는 날이었다.
뒤는........... 그렇고 그런 것을 합니다(산통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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