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이 넘어가는 순간은 항상 빠르다. 눈을 깜박이면 숫자가 바뀌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번 달에도 어김없이 달력을 넘기던 안즈의 눈이 한 곳에 고정됐다.
“…….”
아,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종이를 넘기던 손을 놓은 채 잠시 숨을 골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안즈에게 있어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특별한 그 날이 다가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복잡할 필요가 있을까? 혼자 던져본 의문은 어떤 대답도 내지 못했다. 일단 얄궂은 운명이, 안즈의 편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아니, 그냥 내가 나쁜 거야. 안즈는 쓸쓸한 눈빛을 감출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다시 달력을 바라봤다.
어쩜 이렇게 잔인한 숫자가 존재하는 걸까.
* * *
“올해는 뭐가 좋을까요?”
“진짜 나올 줄이야. 쓸데없이 충실하네, 정말.”
질문에 맞는 답이 아닌 엉뚱한 대답을 던진 이즈미는 앞에 앉은 안즈를 뚱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오프 날이니 나오라고 한 건 자신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정말 얌전히 나와서 마주앉아 있으니 왠지 짜증난다고나 할까.
“……알맞은 대답이 아닌데요.”
안즈의 얼굴 역시 뚱해졌다. 아니, 이 녀석은 원래 좀 뚱한 표정이니까 정확히는 목소리 톤에 조금 변화가. 아무튼 이즈미는 입을 다문 채로 테이블 위에 있는 커피를 빨대로 젓기만 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안즈는 조금 눈동자를 굴리더니 다시 질문했다.
“그래서, 뭐가 좋으세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알고 얘기하시는 거 맞죠?”
모르겠냐고. 속으로만 대답한 채로 이즈미는 쯧, 짜증 섞인 소리를 냈다. 별로 반갑지 않은 계절이었다. 그 건에 대해 얘기하는 게 분명했지만 대답을 해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이즈미는 계속 인상만 찌푸렸다.
그런 이즈미의 표정 변화를 살피던 안즈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음은 알겠지만, 저는 의무를 다해야 하니까, 협조 좀 해 주세요.”
뻔뻔하다는 거, ……잘 알지만. 조금 텀을 둔 뒷말은 아주 조그맣게 공기 중에 흩뿌려졌다. 다행히 이즈미에게 닿긴 한 모양이었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눈썹만 조금 더 움직였을 뿐이었다. 화난 방향으로.
“그냥 제가 알아서 해요?”
지침이 명백한 목소리였다. 차라리 화를 내면 같이 화낼 텐데, 이제 화도 안 내주는구나. 이즈미의 입술 선이 조금 호를 그렸다. 씁쓸함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조금 유지되던 웃음은 곧 입술이 열림과 함께 사라졌다.
“너, 누구를 챙겨주고 싶은 건데?”
“네?”
눈이 커진 안즈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이즈미의 실소가 터졌다.
“의무, 말은 좋네. 근데 그런 의무 누가 너한테 바란대? 너, 아직도 학생이야?”
유메노사키 아이돌을 모두 챙겨줘야 하는 그때 그 시절의 안즈냐고. 그런 의미가 내포된 이즈미의 공격에 안즈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아니면, 여자친구인가?”
찌르고 들어오는 공격에 안즈는 눈을 감았다. 이즈미가 커피를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왜 그렇게 챙겨주지 못해서 전전긍긍이야?”
이즈미가 신경질적으로 커피 컵을 내려놓았다. 탁, 컵의 바닥이 테이블의 부딪히는 소리가 안즈 자신을 원망하는 것만 같아 안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여전히 눈은 뜨지 못했다.
“가라고 놔 줬으면, 좀……”
얼쩡거리지 말아야 할 것 아냐.
끝맺지 못한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삼켰다. 사실 정말 그랬다간 못 버틸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세나 이즈미는, 그때 그 시절부터 이 말만은 내뱉지 못했다.
“……부르셨잖아요.”
안즈의 조용한 목소리가 울렸다. 모습을 드러낸 젖은 눈동자가 이즈미를 곧게 바라봤다.
“밉죠, 저.”
이즈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눈동자 하지 말라고, 당장이라도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자격은 어디에도 없다. 이제 현실을 제법 볼 줄 알게 되었다. 이즈미의 어두운 눈동자가 안즈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왜 나왔어?”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 이즈미의 속내는 예나 지금이나 알기 어렵다. 짜증내는 것 같으면서도 친절하고, 웃는 얼굴이면서도 속은 문드러져 있었던 사람이었으니까. 이즈미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안즈는 그저 덤덤히 앉아 있었다.
“내가 왜 불렀다고 생각해?”
황금 같은 오프 날에.
안즈는 무릎 위에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데, 다리가 묶여있는 것 마냥 꼼짝할 수 없었다. 아, 역시 나오지 말 걸.
“……보고 싶었어.”
안즈의 시선이 테이블로 떨어졌다. 나오지 말 걸.
“나는, 그랬다고. 그냥.”
잔뜩 부담을 주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아주 잘 알았다. 하지만 이 정도쯤은 괴롭혀도 괜찮지 않을까. 안즈도 계속 괴로워했다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저는 더 괴로웠다.
“네가 챙겨야 할 사람을 챙겨.”
멍청하게 아직도 고백을 못했다지. 이즈미는 커피의 마지막 모금을 마신 후 내려놓았다. 비게 된 손은, 그대로 안즈에게 향했다.
“그리고 평생 나한테 미안해 해.”
저를 쳐다보지 못하고 외면하는 시선 앞에서, 이즈미는 안즈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올해 생일선물은 필요 없어. 이미 받았으니까.”
안녕.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 나가는 뒷모습을 차마 쳐다보지 못한 안즈는 싸늘히 식은 자신의 커피를 쥔 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던 11월 2일의 그림자 중 하나는, 안즈의 전 연인이었다.
* * *
처음부터 마음이 없는 걸 알았다.
둘의 교제는 1년 정도로, 안즈가 졸업한 후 이즈미가 거의 낚아채다시피 해 시작한 연애였다. 일단 사귀어 보자고. 안즈가 어쩌다 보니 선배한테 코가 꿰여 있었다며 황당해하던 기억이 선명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애매한 기간이었지만 이즈미는 진심으로 안즈를 아꼈다. 좋아했다. 1년 내내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너는 어떨까.’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는, 점점 제 진짜 마음을 깨달아 갔더랬다.
- 다시 만나서 기쁘구나, 아가씨.
그렇게 말하던 자식을 바라보던 안즈의 눈빛은 이즈미가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그것이어서.
아, 죽어도 하기 싫은 짓을 할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생일 기념 데이트에서 머뭇거리며 또 하나의 포장 박스를 집어 들던 안즈가 눈에 아프도록 박혔던 그 해 10월 말은, 이즈미에게 제일 기억하기 싫은 시간이었다.
“그동안 어울려주느라 수고했어.”
그렇게 말했을 때, 안즈는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사실 보기 싫어서 자세히 보지 않았다.
“안녕.”
그 순간의 안즈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나는 건 꼴사납게 떨리던 이즈미 자신의 목소리뿐이었다.
안녕.
그 한 마디에 담긴 무게를, 이즈미는 여태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