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찾아오고, 새 학기가 찾아오고, 또 다시 벚꽃 페스티벌이 찾아왔다. 1년 지났다고 익숙해지다 못해 노련해진 일처리 솜씨를 새로 들어온 후배들에게 전수해 주는 일상이 계속되다가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계절은 또 한바퀴를 돌아 있었다. 최상급생이 된 안즈도, 그리운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몸담았던 장소를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선배.
선배님들... 안즈의 머릿속에 이미 학교를 떠나 각자의 자리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한명한명 떠올랐다. 겨우 1년 남짓 얼굴을 맞대고 지낸 사람들이었지만, 안즈에겐 각별하게 남아있었다. 되찾은 청춘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 줬던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잊어버릴 만큼 매정하지 않으니까.
- 연락해. 너나 나나 바쁘긴 하겠지만 설마 안즈 연락 받을 시간도 없을까?
한명한명 그려보다가 문득 떠오른 은회색 머리카락의 선배의 모습에 안즈는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학기 말부터 눈에 띄게 상냥해졌던 그 선배, 세나 이즈미는, 졸업 당일에도 안즈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연락해, 그 한 마디에 조금 기뻤다는 걸 선배는 모르겠지. 안즈는 1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그 말을 곱씹어보곤 했다.
'결국 연락은 안 했지만...'
조금 올라갔던 입꼬리가 이내 쓴웃음으로 변했다. 왜 그랬을까? 분명한 건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안즈는 분명히 그 말을 기억했고, 시도도 했었다. 실패했을 뿐이지. 안즈가 갈곳없는 손을 내려 괜히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연락해. 그 한 마디를 던지던 이즈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안즈가 이즈미의 번호 하나하나를 눌렀다가 지웠을 때의 감정과 같았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즈미 역시 안즈에게 연락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 혹시 바쁜데 방해가 되는 게 아닌가요?
- 선배는 나를 잊었는데 나 혼자 망설이는 걸까요?
그래서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던 이즈미의 생일 역시 안즈의 다이어리 안에서만 조그만 표시가 되어 지나가고 말았다.
"먼저 연락하라고 한 사람이 이러는 게 어디 있어?"
탁, 안즈가 다이어리를 펼쳤다가 덮었다. 마지막으로 펼쳐져 있던 2월의 페이지에 빨갛게 그려져 있던 별들이 모습을 감췄다.
어차피 이렇게 되었다면, 마음이라도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바로 한달 전의 일이었지만 답례제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여전히 이즈미에게는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 * *
"다녀왔습니다."
탕, 가볍게 닫히는 문소리에 안쪽에서 고개 하나가 쑥 나왔다. 동생이 집에 돌아와 있던 모양이었다. 안즈가 살짝 손을 흔들어주자 동생이 고개를 끄덕 하곤 다시 모습을 감췄다. 안즈도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택배 왔더라."
방으로 들어가려는 안즈가 어깨를 톡톡 치는 느낌이 들어 돌아보면 어느새 뒤에 와서 선 동생이 조그만 택배상자 하나를 들고있는 게 보였다. 택배? 올 곳이 없는데. 감도 잡히지 않는다는 표정의 누나를 본 안즈의 동생은 갸웃 하더니 발신인의 이름을 읽었다.
"세나... 이즈미."
아, 연예인이다. 본인이 받아놓고 발신인의 이름은 이제서야 제대로 본건지 동생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윽고 안즈가 휙 뒤돌아섰다.
"세나 이즈미?"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동생이 안즈에게 택배 상자를 폭 안겨주곤 슬쩍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안즈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방문을 열었다.
'거짓말.'
왜?
괜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안즈는 책상 위에 상자를 내려놓고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진정을 해야 했다. 이건 결코, 그래, 별 거 아닐 거라고. 받았으니 답을 준 것 뿐이다. 부재중 전화 기록을 보고 연락을 하고, 문자를 보고 답장을 하는 것처럼 극히 자연스러운, 그런.
"일단..."
뜯자.
안즈의 손이 천천히 상자로 향했다. 꼼꼼히 테이핑된 상자를 커터칼을 이용해 뜯으니 앙증맞은 사탕상자가 보였다. 분홍색의 사탕상자.
"......."
분홍색을 본 안즈의 눈이 조금 떨렸다. 분홍색은 안즈가 좋아하는 색이다. 그리고 안즈는 한달 전 자신이 이즈미에게 보낸 상자의 색깔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알아봤어.'
가볍게 떨려오는 손을 상자 뚜껑에 갖다 댔다. 세나 선배, 알아봐 주었나요? 기억하고 있었나요? 안즈가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아.."
앙증맞은 사탕뭉치들의 위에 나란히 놓여져 있는 카드가 눈에 들어오자 안즈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터져나왔다. 안즈는 곧 느린 동작으로 카드를 집어 한글자 한글자 읽어나갔다.
- 엄청 달았으니까 내년엔 다른걸로 보내. 당당하게.
간결하게 쓰여있는 문장에 안즈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이름 한글자 쓰여있지 않았지만 정확하게 안즈 자신을 가리키는 듯한 어투에 거만하게 웃고 있는 이즈미의 얼굴이 머릿속에 클로즈업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