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줏대도 없이 화도 못내는 심약한 여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언제 이렇게 되었을까. 레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고객한테 이런 마음을 품다니. 사실 레이에게는 고객과는 사귀지 않는다는 아무도 모르는 철칙이 있었기 때문에, 이 상황이 썩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생각하는 대로 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닌 무언가겠지.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화를 낼 마음이 안 드나?"
그리고, 이제 알고 있었다. 화를 내지 못하는 게 아니고, 내지 않는 것이다. 레이의 시선 끝에 앉아 종이뭉치를 들여다보던 여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었던 것들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힘이 없는 동작이었다.
"……그냥,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모자랐겠죠.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그런 말이 들려오는 기분에 레이의 입매가 삐뚤어졌다. 물론 여자는 그런 레이는 아랑곳 않은 채 테이블에 내려놓은 종이뭉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지겹게도 본, 남자친구의 외도 현장이다.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뒷조사를 해서 가져다주고 있는데 아직도 헤어지지 않았다. 독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애초에 본인보다 친구가 더 열정적이었던 의뢰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얘를 고집하는 이유가 뭐야?"
이 질문도 처음 묻는 건 아니었다. 대답도 알고 있다.
"고집이 아니에요. 기다리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표정은 나 슬퍼요, 를 숨기질 못한다. 레이가 한숨을 쉬었다. 저딴 놈이 솔직하게 나 바람 피우니까 헤어지자, 하겠나? 목적이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사진 속 바람 상대들은 언제나 어른스럽고 쭉 빠진 여성 뿐이었다. 그러니까, 제 눈 앞의 작고 귀여운 여자와는 정반대의 타입. 저렇게 순진하고 착한 애를 등쳐먹는 너 이놈 새끼, 아마 천벌을 받을 거다. 사진 속 허우대만 멀쩡한 남자를 흘낏 보며 그렇게 생각한 레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모자란 거 하나도 없어. 이딴 새끼한테 목숨 바쳐 사랑 줄 필요도 없고."
"별로 목숨을 바치는 건……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요."
"보통 여기 이런 용건으로 오는 여자들은 현장이 잡히면 바로 응징하러 뛰어가. 근데 넌 몇 달이 지났는데 그냥 들여다보고만 있잖아. 솔직하게 말하면, 뭐, 용서해 주기라도 하게?"
"……."
쏟아지는 사실적시에 여자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마음의 상처는 상처대로 받고, 상황은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고. 아무리 생각해도 악의 고리였다. 그리고, 아까웠다.
'저딴 놈한테 잡혀있기엔 너무 아깝지.'
푹신한 소파에 기대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있던 레이가 자세를 바르게 했다. 레이의 움직임을 느낀 여자가 조금 시선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남자들이 줄 서는 타입 아냐?"
"……아뇨, 별로 그렇지는……."
"그래도 이딴 놈은 버려. 너무 쓰레기야. 재활용도 안 돼, 이 정도면."
"……하지만."
대체 뭐가 그리 미련이 남는 건가. 이유라도 들어보자 싶어 가만히 있자니 여자의 입이 다시 열렸다.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 거라고는 했지만…… 그렇게 지저분하게 끝내고 싶지 않아요."
허. 레이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그간 봐온 바 감성적인 건 알았지만 이런 생각을 했을줄은 몰랐다. 하지만 말을 한 장본인은 진심인 듯 거의 울기 직전의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 레이는 어이없는 마음을 잠시 죽이고 신중하게 할 말을 골랐다. 즉, 허탈함을 느낄 새가 없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그럼 그냥 나랑 사귀면 되잖아."
"……예?"
아, 동그래진 눈이 제법 귀엽다. 레이는 맞은편을 향해 허리를 숙인 채로 웃으며 턱을 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을 뱉었다.
"첫사랑 말고, 마지막 사랑 해 볼 생각 없어? ……안즈."
이게 무슨 소리야. 제 고용인의 뜬금없는 폭탄 발언에 사고가 정지된 안즈가 할 수 있는 일은 폭탄을 터뜨려 놓고 예쁘게 웃고 있는 레이에게 멍하니 시선을 고정하는 것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