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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로스로드 스토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1년 전 레이와 유메노사키 전학 전 안즈가 만납니다.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높은 이상일 것인데, 자신에게는 그저 쉽게 해치울 수 있는 소일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목표를 세워도 금방 해치워버리고, 주위에서 제발 도와달라며 손을 뻗어오는 모든 일들은 이 손 안에서 손쉽게 해결되어버린다. 권태였다. 아무도 가까이 와 주지 않았다. 왜 오지 못할까. 이렇게나 기다리고 있는데.
레이는 모든 것이 시시해졌고, 지쳐갔다. 재미없는 세상, 재미없는 관계. 유일하게 친구라 여겼던 소년조차 자신을 완전히 이해해주진 못했다. 그런 운명이었던 것이겠지.
"……."
그 날도 오랜만에 귀국해 제멋대로 활개를 치고 다니다가 갑자기 밀려오는 피곤함에 아무도 없는 구석진 곳을 찾아 털썩 주저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이러고 적당히 앉아 있다가 적당히 떠나자.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뒤로 젖혀 벽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옷이 더러워지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사쿠마 레이는, 지금 당장 밀려드는 피곤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조용한 게 최고지."
당연하게도 으슥진 골목에 혼자 앉아 있으면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다. 넌 인기도 많으면서 왜 이런 구석에 처박혀 있는 거냐ㅡ고 물은 소년이 있었지. 인간이라는 존재를 사랑하지만, 사람은 피곤했다.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판단하며 멋대로 의지하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만 둘러싸여 산다는 건, 생각외로 정신력을 많이 소모한다. 슈퍼스타라고 해서 그런 피곤을 모두 감안해야 하는 것인지.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친구도 배신한 마당에 무슨.
"그건 그렇고, 너무 돌아다녔나. 머리 아프구만……."
햇빛을 너무 많이 받은 모양이다. 그런 체질인 거다. 저렇게 밝은 빛이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독이다. 고칠 수도 없이 이어져 내려오는 저주같은 체질. 레이 자신과 그 동생을 빛의 세계에서 단절되게 한 가장 큰 원인. 지끈대는 머리를 진정시키려 이마에 손을 올려 꾹꾹 눌러보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후, 한숨을 내쉰 후 이마에 올린 손을 그대로 내려 눈을 덮었다. 이게 너희가 말하는 슈퍼스타의 진짜 모습이라고 하면 실망할 건가. 별 쓸모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피식 웃음이 터졌다. 어차피 그들에게 사쿠마 레이란 신인 거다. 이렇게 구석에 처박혀 두통을 호소하며 주저앉아 있는 보잘것없는 인간이 아니라. 멍청이들 같으니라고. 인간 취급을 안 해주는데 내가 인간 편을 들어줘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야. 쭉 뻗은 다리 중 한 쪽을 굽혀 팔을 올렸다. 부디 아무도 오지 마라. 지금은 아무에게도 방해받기 싫은 기분이었다.
"……."
그랬는데. 아무래도 글러먹은 듯 한데……
"지나가."
"……아, 에……"
여전히 눈은 가리고 있었지만 누군가 쭈뼛쭈뼛 서 있는 기척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골목이라고는 해도 도로변의 건물 사이 어둑한 공간이었으니 누군가 지나다니다 봐도 별 수는 없었지만, 보통 이런 아무것도 없고 기분 나쁜 공간에 올 사람은 없다. 불량배가 아닌 이상에야. 하지만 불량배라면 진작 들어와 비키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고, 불량배로 오해를 받은 것이라면 저렇게 눈치 볼 것 없이 바로 지나갔겠지. 레이는 눈을 덮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지만 눈은 뜨지 않은 채 길게 한숨을 쉬었다.
"볼일 없으면 지나가. 딱히 위험한 사람도 아니고 이렇게 앉아있다가 알아서 갈 거니까 신고는 하지 말아주면 땡큐."
"……."
그렇게 말하고 팔짱을 끼는데, 타박타박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발소리는 레이의 앞에서 멈췄다.
"뭐야……"
지나가랬더니 뭐 하는 건가 싶어 눈을 뜬 레이는 눈 앞에 보이는 풍경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다 겁도 없이 어둠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은 다름아닌 여자였다.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 아마 고등학생. 아, 저 교복이라면 알고 있었다. 레이가 다니는 유메노사키 학원의 자매교다. 확실히 이 근처이긴 한데. 날 알아 본 건가. 대강 스캔을 마친 레이는 소녀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볼일이 있다면 얼른 끝내고 가 줬으면 싶었다.
"왜 이런 데서 그러고 있는 거예요?"
"뭐?"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 아픈 거예요? 그렇게 있으면 옷이 더러워질 텐데……"
"……."
이게 무슨. 레이의 눈동자가 의문을 담고 커졌다. 날…… 모를 수야 있지. 그래. 모를 수 있다. 메이저 데뷔를 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보통 이런 어떻게 봐도 썩 좋은 인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남자가 어둑어둑한 공간에 혼자 앉아 있는 걸 걱정하는 여자가 존재해? 혼란스럽게 변한 레이의 표정을 본 소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아프신 거면…… 병원까지 같이 가 드릴 수는 있어요."
"허어."
어차피 병원에 가서 나을 병은 아닌데. 평소라면 그렇게 말하고 쫓아냈을 텐데 어째선지 별로 그럴 맘이 들지 않았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완전히 처음 겪는 사태에 레이는 소녀를 다시 한번 훑었다. 어딜 가나 있을 평범한 여고생. 조금 예쁘장한 얼굴이긴 했지만 평균 수준이고, 어디 하나 특출난 데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끌렸다. 삼류 연애소설에 나오는 나에게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심리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재수없다 할지라도 사쿠마 레이는 어디 가서 빠질 인물은 아니니까.
"어이, 이름 모를 너, 그거 알아?"
"네……?"
소녀, 안즈는 남자에게 눈높이를 맞추려고 굽힌 무릎에 올려놓은 손을 유지한 채로 눈을 깜박였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안즈를 쳐다보는 남자는 대단한 미형이긴 했지만 어딘가 다가가기 어려운 날카로운 분위기였기 때문에 솔직히 조금 긴장되었다. 괜히 말을 걸었나 싶었지만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내가 평소엔 아무도 올려다 볼 일이 없거든."
"……?"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남자가 곧은 시선으로 안즈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빨려들 듯이 빛나는 붉은 눈동자와 똑바로 마주하자 안즈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왜 지저분한 바닥에 아무렇게나 퍼져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내가 올려다보고 있지……"
"……앉아 계셨으니까요……?"
"그래. 거기다 이상한 걱정까지 받았어……."
"걱정됐으니까요……"
그리고 나오는 말들마다 조용한 말투로 대답을 얹는 안즈를 이상하게 바라보던 레이는 곧 웃음을 터뜨렸다. 그 생소한 모습에 안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딱딱한 얼굴로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웃음이 참 밝은 사람이었다. 계속 웃었으면 좋겠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재미있네."
간만에 크게 웃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동안 이렇게 웃을 일이 없었다는 것도. 목적 있는 호의는 지겨울 정도로 받아봤지만, 이런 어처구니 없는 호의는 처음이다. 레이는 앞에 있는 소녀의 얼굴을 외울 기세로 바라보았다. 조금 당황한 듯 한 눈망울이 예쁘고, 살짝 상기된 볼이 귀엽다. 아무도 올려다 본 적이 없었는데, 올려다 보는 것도 의외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어쩌면 많이.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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