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메노사키는 한창 바쁠 시기였다. 크리스마스 시기엔 연례행사인 스타페스가 열리니까, 안즈는 그 준비 때문에 눈코뜰새없이 바쁜 도중이었다. 물론 메이저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스타덤에 올라 대형 신인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레이 역시, 한가하지는 않았다. 연말 무대 준비도 해야 했고, 아무튼 이것저것 할 것이 뭐가 그렇게 많은지 일에 깔려 살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이 생활이 싫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레이도 안즈도, 일하는걸 즐기는 성격이었기에 그런 바쁜 생활 자체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딱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가씨? 듣고 있는가?"
"으응, 듣고 있어요……"
아니, 누가 들어도 반쯤 잠에 취해있는 목소린데. 레이가 살짝 미간을 좁힌 채 쯧 혀를 찼다. 보나마나 오늘도 학교에서 종일 일하다 지쳐 귀가한게 분명했다. 그럴 시기니까 이해는 하지만…… 어련히 잘 하겠거니 믿고 있긴 해도 돌봐줄 3학년도 다 졸업한 지금, 레이는 안즈가 자기 자신이 감당 못 할 정도로 무리하는 게 아닌지, 또 혼자 모든 걸 다 떠안고 지내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될 때가 있었다. 물론 옆에 아무도 없는 것도 아니고 트릭스타와 후배들도 있을 것이며, 안즈도 이제 졸업을 앞둔 어엿한 3학년인데도. 그냥 연상의 오지랖으로 치부되어도 할 말은 없었지만, 레이는 현재 안즈의 연인이 아닌가. 돌고 돌아 잡은 인연인 만큼 이 정도의 오지랖은 부려도 되지 않은가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제 밤을 새거나 한 건 아니겠지?"
"으응, 걱정 마요. 밤은 안 샜고…… 지금 씻고 나와서 누우려던 참에…… 졸려……"
"휴……."
수화기 너머 안즈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선명히 들으려 휴대폰을 귓가에 바짝 대고 있던 레이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오늘도 글른 것 같았다. 요 며칠 서로 바빠서, 또는 바쁜 시간이 엇갈려서 제대로 통화조차 하지 못했는데 겨우 연결된 전화도 이 모양이다. 안즈의 목소리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 사람의 그것이었기에 이미 제대로 된 통화를 하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어 보였다. 애초에 피곤한 사람 붙들고 통화하려고 드는 게 문제일 수도 있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란 말이다.
"아가씨, 안즈? 누웠나?"
"네……"
"이미 반쯤 꿈나라구먼……."
풀썩, 침대에 쓰러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말을 걸어보았더니 예상대로 눕자마자 의식의 반은 이미 잠에 들어버린 듯 했다. 이 작은 아가씨를 어쩌면 좋나. 들리지 않을 한숨을 한번 더 내쉰 후, 레이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안즈,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인 건 알고 있겠지?"
"……응……"
"……흡혈귀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이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뭐, 이 얘기는 작년에도 했구먼. 아무튼, 이 몸은 안즈와 함께 있고 싶었단다. 그것만 알아줬으면 좋겠구먼…… 이라고 해봤자 이미 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
안즈가 조금씩 대꾸해주던 목소리도 그치고, 완전히 잠에 들어버린 게 틀림없는데도 레이는 선뜻 전화를 끊지 못했다. 목소리 대신 새액새액 숨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전해져왔다. 숨소리를 감상하는 취미가 있는 변태인 것은 아니지만, 목소리도 얼마 듣지 못한 아쉬움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기가 망설여졌다. 편안하게 자고 있구먼. 못 자는 것보다는 낫지만. 안도하면서도 느껴지는 안타까움에 레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휴대폰만 움켜쥐고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몸도 바빠서, 시간을 많이 내지 못했지만…… 아가씨랑 좀 더 같이 있고 싶었는데. 사귀고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가 아닌가. 일에 열심인 아가씨도 좋지만 이 몸을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아가씨도 보고 싶은데……"
"……."
새액, 새액. 수화기 너머는 여전히 희미한 숨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음. 하고 싶은 말은 이거라네. 바쁜 일이 다 끝나면 온전히 나를 위해서만 시간을 내줄 것. 내 욕심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보고싶은데…… 투정부릴 수는 없잖은가. 이래봬도 연상인데."
어차피 듣지도 못하는데 뭐 하는 짓인가 하면서도 레이는 말을 끊지 않았다. 의외로, 이 고요함이 꽤 맘에 들었던 탓이다.
"오늘도 많이 보고 싶었는데…… 아가씨도 그랬는지 궁금하구먼. ……나는 그만큼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야, 안즈."
"……."
"그럼, 잘 자게나. 좋은 꿈 꾸고."
평소라면 이렇게 줄줄 부끄러운 말을 읊지 않았을 테지만, 어차피 듣는 사람은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중이니.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어렵사리 통화 종료를 하려고 하는 순간, 조그마한 소리가 들렸다.
"……나도, 좋아해요…… 많이많이, 레이 씨……"
부정확한 발음에 잠꼬대라는 것이 분명하게 티나는 말이었지만, 그 순간 들려오는 그 잠꼬대는 레이를 웃게 하기 충분했다. 잠시 눈을 크게 뜬 레이는 곧 피식 웃어버렸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여주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안즈.
힘들어. 지쳤어.
큰 행사가 드디어 끝이 났다. 마무리까지 다 하고 학교를 나서는 안즈의 발걸음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정말 피곤했다. 레이에게 전화가 왔는데도 대충 끊어버렸을 정도로 바빴으니까. 물론 타이밍 나쁘게도 한창 뛰어다닐 때 걸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아무튼 모두 지친 관계로 뒷풀이는 뒷날 하는 것으로 정해져서 천만다행이었다. 시간도 늦었고, 춥기까지 해 종종걸음으로 학교를 나서는 안즈의 머릿속에는 딱 두 가지 생각뿐이었다. 한 가지는, 얼른 집에 가서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한 후 침대에 뛰어들어 쉬고 싶다.
"안즈."
"……?"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는……
"……레이, 씨?"
"응. 레이라네~"
빙긋 웃으며 서 있는 제 연인의 얼굴이 환상이 아닌가 싶어 눈을 비비고 빤히 쳐다봤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환상은 아닌 듯 했다. 서서히 안즈의 표정이 환해지고, 걸음이 빨라졌다.
"레이 씨!"
안즈의 빨라진 걸음을 본 레이의 양팔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곧 안즈가 웃으며 넓은 품에 파고들자, 레이는 벌렸던 양팔로 꼭 안아주었다. 그리웠다는 듯 품 속에서 볼을 부비는 안즈가 너무 사랑스러워 어느새 입가에는 웃음이 만연했다.
"레이 씨이……."
"응, 그래, 그래. 수고했네."
이 체온을, 목소리를 생각보다 더 그리워했나 보다. 안즈가 레이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안즈."
"……."
머리 위에서 다정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안즈의 입가가 편안하게 늘어졌다. 크리스마스라고, 하루종일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이제서야 진짜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기분이었다. 노곤한 눈을 감고, 안즈 역시 조그마한 목소리로 답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레이 씨."
나머지 한 가지는, 사랑하는 연인을 보고 싶다. 그건 아마,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이었던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