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 사람의 과거 여자관계가 그렇게 깨끗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옆에서 들리는 말도 있었고, 일단 얼굴부터가 여자친구가 없었을 얼굴이 아니었기에 안즈는 그다지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굳이 스스로 궁금해하지 않았고, 레이는 그 점을 내심 다행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과거는 과거잖아요, 했을 때 레이가 지었던 웃음은 안도의 것이었으니까.
"어머, 이게 누구야. 레이 군 아니야?"
"……?"
하지만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 이런."
간만의 데이트, 레이와 안즈는 그저 평소대로 서로 손을 꼭 잡고 거리를 걷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그 사람들 중에 레이의 과거와 관련이 있는 여자를 만날 확률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걸까. 안즈는 슬쩍 레이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곤란한 류의 사람인지, 레이의 표정에는 난처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전 여자친구 정도는, 괜찮은데. 응, 괜찮은데.
"뭐야아, 내가 눈치없이 말 걸었나?"
'완전요.'
일부러 말 걸었으면서 아닌 척은. 안즈는 여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 날씬해. 글래머러스, 짧은 치마, 짙은 화장…… 그야말로 치명적인 어른 여자라는 느낌이었기에 안즈는 레이와 맞잡은 손에 힘을 뺐다. 이 사람, 정말로 이런 어른 여자 취향이었던 거야. 왠지 괜히 주눅이 들기 시작해 손을 빼려고 살짝 당기는데, 빠지지가 않았다.
"우리가 이렇게 친밀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지 않나? 방해한다는 자각 있으면 그냥 가던 길 가."
가만히 안즈의 행동을 지켜보던 레이의 입이 열렸다. 그 입이 쏟아낸 말이 제법 냉정한 것이어서, 여자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안즈는 여전히 손을 빼보려고 노력했지만 레이의 굳건한 손힘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점점 세지는 것 같기도 했다.
"왜 아니야? 그렇게 질척한 하룻밤을 보냈는데. 마음은 안 섞였을지라도."
"야……."
"……."
손을 빼내려던 안즈가 순간 멈칫했다. 레이 역시 그걸 느꼈는지 당황한 눈빛으로 안즈의 눈치를 봤다. 적당히 상대하고 자리를 뜨고 싶었는데, 완전 망해버린 거다. 안즈가 입술을 꾹 물었다. 그냥 여친이 아니라…… 그런…… 그런 상대였다는 거야? 그리고 이내 휙 고개를 든 안즈는 울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레이를 째려보았다. 그래, 이런 조그맣고 유치한 취향인 애보다는 저렇게 세련되고 어른스럽고 몸매도 좋은 여자가 취향이었겠지. 알고 있었는데, 레이가 저를 선택한 게 이례적인 선택이었으며 주위에서도 눈이 휘둥그레졌던 걸 알고 있었는데도, 이렇게 직접 현실과 마주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자친구야?"
그런 안즈를 눈치챘는지 여자는 시선을 안즈에게 옮겼다. 그리고 얼굴부터 발끝까지 한번 쭉 훑더니, 한 손을 올려 입가를 가렸다. 뭐야, 무슨 의미야, 저거. 안즈의 기분따윈 어찌되든 좋은 것 같은 여자는 곧 놀라움이 섞인, 그러나 조금 측은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대체 뭐가 그리 안타깝고 측은한지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딱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여자는 레이와 안즈가 어울린다는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다. 그 감정이 안즈에게까지 보였다.
"흐응, 취향이 많이 바뀌었네? ……내가 알던 사쿠마 레이랑은 많이 다른데?"
"뭐가 목적인지 빤히 보이는데 잠자코 들어주자니 끝이 없네. 네가 나에 대해 뭘 얼마나 알았다고 잘난 척 하는 거냐?"
레이는 한숨을 한번 쉰 후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안즈가 느끼고 있는 기분이 전달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안즈가 계속 자신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하는 것도 느껴져서 레이는 오히려 손에 힘을 더 꽉 주었다. 지금도, 그랬다. 여자의 발언 후 다시 한 번 손을 빼내려 힘을 주는 안즈의 손을 꾹 힘주어 잡았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라고. 지금 주눅들어야 할 상대는 안즈가 아니고, 저 여자다. 저 여자야말로 현재 자신에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데, 소중한 안즈만 상처입는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이게 다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가 원인이긴 했지만, 그건 나중에 사과하도록 하고. 일단 저 여자를 내쫓는 것이 급선무니까.
"왜 몰라? 난 자기가 침대에서 어떤지도 알고, 그동안 만나왔던 여자 취향도 아는데. 귀찮게 하는 걸 싫어한다는 것도."
"잘 말했네. 알면서 왜 자각 못해? 너 지금 나 귀찮게 하고 있고, 짜증나고 있으니까 가던 길로 꺼져. 끝난 인연 붙들고 질척거리지 말고. 그리고 누가 자기람?"
"냉정하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을 뿐인데? 또 언제 만나서 그럴 지 모르는데 너무 그렇게 굴지 마.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잖아? 이번 여자친구는 얼마나 사귀고 찰 예정인데?"
안즈는 더이상 손을 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저 레이에게 손이 붙들린 채로, 그냥 힘만 주고 있었다. 제가…… 레이 씨한테 안 어울린다는 거 알아요. 울면서 고백했던 그 때의 기억이 스치자 그대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역시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걸까.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거야…… 이런, 만인에게 사랑받는 슈퍼스타에게 어른스럽지도 않고, 눈이 뜨일 정도로 예쁘지도 않으며, 몸매도 그저 그런 소심하고 평범한 여자애 따위는. 레이 씨도, 과거에는 이런 스타일 따위 눈길도 주지 않았겠지. 다 아는데도 서러웠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안 차. 내가 미쳤냐? 어떻게 손에 넣었는데."
"……?"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오는 레이의 목소리에, 안즈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 눈동자가 레이에게 그대로 박혔다.
"넌 과거의, 아무 효력도 의미도 없는 사람. 얘는, 현재의 내 사람이자 미래도 같이 할 사람."
"……레,"
"알았으면 가봐. 네 자리 더 이상 없으니까. 아, 그리고."
안즈가 가까스로 던진 레이의 이름은 레이가 이어서 던진 말에 막혔다. 곧 레이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안즈도 한 발자국 뗐을 때, 안즈에게 레이가 그 여자에게 스치듯 던지는 말이 들렸다.
"네가 알고 있는 것들, 우리 안즈가 나에 대해 아는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니까, 우쭐하지 말고. 겨우 하룻밤 보낸걸로 말이 많네?"
"뭐, 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레이는 안즈의 손을 잡은 채로 여자를 그대로 지나쳤다. 덕분에 안즈는 여자가 그 후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자고 그런 민망한 말을 하냐고 따져야 할 것 같은데,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 어떡해.
"주눅들지 말아줘, 이 아가씨야. 현재를 살고 있잖아. 지금 내 옆에 있는 건 넌데."
"……."
"앞으로도 나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줘. 다 보여 줄 테니까. 창피한 과거까지도, 원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