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데이트에서 레이가 건넨 첫 마디였다. 안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이를 바라보았다. 약속 시간에 늦은 것도 아니고, 딱히 미안할 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영문을 모르는 채 계속 바라보았더니 레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항상 이런 날씨에만 같이 있는 것 같아서.”
“아아.”
씁쓸하게 뱉어진 말에 비로소 안즈가 이해한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날씨라고 하면, 어쩐지 오늘따라 해도 별로 들지 않는 이 우중충한 잿빛 하늘을 말하는 거겠지. 물론 햇빛이 없어 레이가 낮에도 기운을 차릴 수 있는 요인이 되는 건 맞으나, 일부러 이런 날로 약속을 잡은 건 아니었는데도 레이는 미안해하고 있었다.
“레이 씨가 흐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걸요.”
애초에 요즘 날씨는 계속 흐린 상태였다. 일기예보에서는 매번 비가 온다고 했지만 비가 올 것 같은 날씨만 지속되고, 정작 비는 내리지 않는 그런 상황.
“그야 그렇지만…… 어두운 것보다 낫다고는 해도 이렇게 흐릴 때에만 낮에 만날 수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구먼. 맑은 날씨가 어울리는 사람인데.”
추워서 발개진 안즈의 한 손을 감싸 제 검은 코트 주머니에 함께 넣으며 레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장갑은 꼭 하고 다니게나. 이제 정말 겨울이니까. 뒤이어 들려오는 잔소리에 안즈는 그저 작게 웃었다.
“뭐가 그렇게 미안해요.”
“다 미안하지.”
“괜찮은데.”
이렇게 귀찮은 사람이랑 같이 있겠다고 정한 건 스스로였으니까, 레이가 미안해야 할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안하단다. 안즈는 레이의 코트 속에서 잡힌 손을 꼼지락댔다. 본인도 장갑 같은 거 끼지 않았으면서. 오히려 평소 체온이 낮아 추위에 약한 쪽은 레이였다. 대체 누가 손을 덥혀주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 상황이 재미있었다.
“조용해서 좋구먼.”
“이런 날씨에 공원에 놀러 나올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까요.”
“아가씨도 집에서 쉬고 싶었을 텐데.”
“땡. 이 편이 더 좋아요.”
꼼지락대던 손을 살짝 움직여 뺀 뒤 이번엔 안즈가 큰 손을 꼭 쥐어주었다. 오늘은 미안해하는 게 컨셉이에요? 조용하게 물으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게 뭐예요. 풋 웃음이 나왔다.
“역시 데이트하기에는 그다지 좋은 날씨는 아니구먼. 춥기도 춥고. 그냥 집에서 오붓하게 보내는 편이 좋을 뻔 했어. 지금이라도 갈 텐가?”
“레이 씨가 그러고 싶으면 그래도 괜찮지만, 저 때문이라면 그럴 필요 없어요. 이대로 조용히 있는 것도 좋으니까…… 어라?”
말을 이어가던 안즈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손을 빼 손바닥이 하늘로 향하도록 펼쳤다. 레이의 의문을 담은 시선이 안즈의 손바닥으로 향했다가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안즈?”
“……이것 봐요, 미안해 할 필요 없잖아요.”
안즈가 활짝 웃더니 곧 종종걸음으로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와 동시에 레이의 이마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닿았다. 그리고 그제야 레이는 안즈의 행동을 이해했다.
“눈이에요, 레이 씨!”
마치 선물을 받아 신난 아이처럼 부산스럽던 안즈가 뒤돌아 레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에 맞춰 하얀 목도리 끝이 흔들렸다. 그 활짝 핀 얼굴에는 정말 순수한 기쁨만이 담겨 있어서, 레이는 잠시 멍하니 안즈를 바라보기만 했다.
“비가 아니라 눈이 올 거였나 봐요. 이러려고 계속 흐렸구나. 앗, 점점 많이 온다.”
이미 학교는 졸업한 지 오래인데도 천진난만한 여고생 마냥 환하게 웃는 안즈는 맑음 그 자체로 보였다. 그 웃음이 우중충한 날씨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맑아 보여서, 레이는 저도 모르게 팔을 벌렸다.
“춥잖아. 이리 와, 안즈.”
양팔을 벌리고 선 레이를 본 안즈는 예쁜 웃음을 지은 그대로 레이에게 안겼다. 하지만 곧 안기는 것도 좋지만 눈도 보고 싶으니까, 하며 뒤돌아 레이의 팔을 제 양 어깨에 하나씩 걸치더니 뒤에서 껴안은 형태로 만들어 버렸다. 레이는 안을 수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았기에 안즈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둔 채 그저 팔에 힘을 주며 꼭 껴안아 주기만 했다.
“아, 따뜻하다.”
“더 따뜻하게 입고 다니게.”
“잔소리쟁이.”
레이가 딱히 답을 하지 않은 채 안즈의 머리에 턱을 얹은 상태로 팔랑이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또 말이 이어졌다.
“첫눈이에요. 오늘 만나서 다행이다.”
“…….”
“흐리다고 미안해했지만, 이런 멋진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네요. 전혀 미안해 할 필요 없게 됐어요, 레이 씨.”
“……그렇구먼.”
네가 좋다면야. 굳이 뒤의 말은 뱉지 않은 채로 삼키니 안즈가 어깨에 놓인 레이의 양 팔을 꼭 잡았다.
“어두워도 밝아도 비가와도 눈이 와도 레이 씨만 내 옆에 있으면 돼요. 없으면 미안해해도 되는데, 있으면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그래…… 그렇구먼.”
나도 마찬가지니까. 레이는 조용히 눈을 감고 미소를 띠었다.
“첫눈을 레이 씨랑 같이 볼 수 있어서 기뻐요.”
“그래.”
특별한 날이었다.
하늘은 흐렸지만, 그 흐린 하늘을 눈에 새기며 연인은 한동안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