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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한 날은 계속됐다.
“……리츠 군.”
“하아…… 그만해. 대체 몇 번째인지 알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차가운 말만 뱉는 리츠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안즈의 눈이 서글픈 빛을 띠었다. 미안해. 속으로 중얼거려도 닿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치만…… 이상해. 나, 이번에도 기절했잖아. 그런데 눈을 떠 보면 항상 아지트고, 상처도 없고, 다들 우연이라고만 하고.”
“우연이야.”
“이런 우연이 어디 있어?”
리츠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영문 모를 환영을 보고 난 뒤부터, 안즈에게는 계속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죽어도 말을 듣지 않는 이 막무가내 아가씨는 그 사건 이후에도 계속 위험한 일에 자원했고, 당연히 위험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자꾸 누군가 도와주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안즈는 그 사람을 한참 전에 죽은 ‘사쿠마 레이’라고 주장했다. 그 사실이, 리츠는 못 견디게 거슬렸다.
“그럼 그 죽은 사람이 너를 계속 도와주고 있다는 거야? 말이 안 되잖아. 역시 안즈, 당장 이런 일 그만둬. 너 이상해.”
“이상하지 않아!”
“그럼 뭐야!”
싸우고 싶지 않은데 자꾸 싸우게 된다. 안즈도, 리츠도 서로가 서로에게 갖는 무게를 알았기에 이런 상황은 정말 피하고 싶었지만 둘은 어쩐지 그 날 이후로 맞물리질 않았다. 오래 전 죽은 사람인데, 왜 아직도 너는 형의 자리가 그렇게 큰 거야. 리츠는 크게 외쳐버리고 싶었지만 마지막 이성이란 것이 붙잡고 있어서, 그저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리츠 군한테 말하는 거야. 리츠 군은, 본 적 없어? 정말로?"
"…애초에 나는 너처럼 위험에 잘 빠지지 않아. 그리고……"
리츠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나한테는 안 보이고 너한테만 보이는 거라면, 형한테 나는 그냥 거기까지였다는 거 아니겠어. 관심 없어, 그딴 인간."
"리……"
"얘기 끝. 나, 일 있으니까. 이따 봐."
안즈의 말을 냉정하게 끊어버리고 등을 돌린 리츠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기분이 안 좋은 것을 증명하는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안즈의 귀를 아프게 때렸다. 하지만 미안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람이.
자꾸만 떠올라.
-
"너야?"
"……그런데요."
“뭐야, 여자였어? 이것들이 지금 만만하게 본다 이거지.”
뒷세계라고 해도 확실하게 정해진 규칙은 있다. 매일같이 싸움만 하는 것은 아니고, 합법이 아니더라도 사업도 하고 있고, 그에 얽힌 이해관계도 있었다. 오늘 안즈에게 배당된 일 역시 그러한 종류의 것이었다.
“이래봬도 나름 오래 굴러먹어서요. 다른 분이 나오길 원했다면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다들 일이 있으니 그냥 진행하시죠.”
“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년이랑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아, 망했다. 안즈는 한숨을 쉬었다. 뒷세계라고 여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드물기는 했다. 그래서 일 상대는 거의 다 남자. 그 중에서도 말이나 행동이 아주 거칠고 사나운 남자들. 혹은 본인은 조직원이 아닌 일개 뒷세계 가게 오너일 뿐이라도, 길가에서 구르는 폭력배들을 돈을 이용해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 거기에 안즈는 아무리 진한 메이크업으로 얼굴을 바꿨어도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어린 여자였기 때문에, 이렇게 얕잡히는 일이 많았다. 패싸움에 투입되지 않는다고 편안한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싸우고 다치는 게 낫지. 그 편이 훨씬 정신소모가 덜했다. 아무튼, 대체 누가 누굴 만만하게 본다는 거야.
“기본이 안 됐구만. 건방지게…… 우리가 그렇게 만만해? 잡아!”
“윽?!”
그렇게 한숨을 쉬고 무력으로 진압할까 어쩔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억센 남자들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이런, 당했어! 방 안에 저 남자 이외에 누군가가 더 있는 것 같은 느낌은 받았지만, 갑자기 우르르 몰려나오는 꼴을 보아하니 분명 밖에도 포진되어있을 것 같았다. 역시 규모가 작다고 방심하면 안 됐던 건가. 안즈가 얼굴을 구기고 다시 앞을 바라보자 사나운 남자는 동료와 함께 뿌듯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혼자 나오라고 정말 혼자 나오나? 멍청하기 짝이 없구만. 우리가 너희한테 얼마나 원한이 깊은데, 좀 오래 해먹었다고 잘난 척이나 해대고 말야…… 어? 이런 여자 하나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도 별 타격 없지 않을까?”
“……이딴 싸구려 깡패들이나 쓰는 주제에 건방지게. 나는 그래도 말단은 아니거든? 가게 날아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판단은 잘 하는 게 좋을 거야.”
안되겠다 싶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투로 대답해봤지만, 남자는 이미 안즈를 아랫사람 보듯 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문은 들었지. 죽은 남자한테 미련이 덕지덕지 남아서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멍청한 여자 얘기. 그래그래, 생각났어. 그게 네년이냐? 조직에서도 버림받은 것 아냐? 보통 이런 구린 뒷거래에 경호할 사람들은 딸려 보내주지 않나? 하하하하.”
“…….”
안즈는 입술을 꾹 물었다. 그래, 확실히 겉으로 드러나는 여자 조직원이 있다는 건 드무니까 모르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소문이 나 있는 줄은 몰랐다. 그 당시 레이의 죽음은 다른 조직들에게도 엄청난 뉴스거리였으므로 저절로 그가 귀여워하던 여자아이의 존재까지 가십거리가 된 것일까.
“할 말이 없나 보군. 마지막으로 뭐라도 말하게 해 줄까 했더니만.”
“…….”
맞다. 할 말이 없었다. 왜냐면, 모르는 척 했어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으니까. 안즈가 조직에서 태어나고 자라 이 일을 선택할 때까지를 모두 지켜본 친근한 간부들이야 안즈를 보호하고 싶어 했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달랐다. 같은 조직 사람이라고 모두 깨끗한 감정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실력도 감수성도 이런 어둠의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안즈를 눈엣가시, 혹은 쓸모없는 조직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게 안즈의 존재가 부각되어갈수록, 윗선에서도 어쩔 수 없이 점점 안즈를 내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반반한 얼굴인데 아깝기는 하지만…… 흠, 그래. 한 번 대주면 살려줄 수도 있어. 어때, 계집. 실망스럽게 하지 않을 자신은 있는데?”
웃기는 소리. 안즈가 픽 웃었다. 저런 발언, 이제 지겹게 들어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정말 ‘대준다’고 해도 살려줄 마음도 없으리라. 안즈 역시 그렇게 순순히 죽어줄 마음은 없었다.
“웃어?”
“응. 웃기잖아. 있지, 공과 사는 구분하고 사는 게 좋을 거예요. 여자가 그렇게 좋아도 때와 장소는 구분 좀 하시죠. 내가 그렇게 갖고 싶어 할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까도 말했다, 말단이 아니라고. 당신들 박살나고 싶은 거야?”
기분 나쁘게 웃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점점 구겨졌다. 제대로 타격을 먹인 모양이었다.
“하! 에이스도 죽고 하향세 타고 있는 조직이 뭐가 그리 무섭다고! 시건방을 떠는군! 그래, 그렇게 죽고 싶으면 죽여 줘야겠지. 곧 그렇게나 보고 싶어 하던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주지!”
“윽!”
남자가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꼼짝 못하게 구속하고 있던 남자들이 안즈를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윽, 딱딱한 바닥에 턱이 부딪히고 볼이 긁히는 아픔에 안즈가 이를 악물었다. 이 정도,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데. 그래야 하는데. 다리도 움직여 봤지만 역시 막혔다.
“…나……는, 이렇게는…… 못 죽어.”
한방에 보내지 않고 고통스럽게 하다가 보낼 작정인지, 남자들이 발을 드는 게 보였다. 와, 여자를 패네.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조금 웃겨 슬쩍 웃은 후 안즈는 이를 악물었다. 난 못 죽어. 죽을 수 없어. 여기서 피떡이 되어도 죽는 건 안 돼.
“반죽음으로 만들어 버려!”
적어도 개죽음은 맞이하지 말자고, 이 일을 시작할 때 그렇게 다짐했으니까. 사쿠마 레이. 그 사람을 위해서.
“……그런 거 부탁한 적 없잖아, 바보가.”
그 순간이었다.
“자, 다들 동작 그만. 가정교육 제대로 못 받은 티 내지 말자고. 여자를 패려고 들다니 정말 최악이구만. 고급진 척이란 척은 다 하고 있어도 결국 깡패라는 증거 아니겠냐.”
쾅, 갑자기 문이 열리고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런 습격에 당황한 남자가 문 밖을 살피려 고개를 빼자, 침입자가 삐딱하게 입 꼬리를 올렸다.
“아, 저 녀석들이 궁금해? 급해서 기절밖에 못시켰는데 꽤 아프긴 했을 걸. 자, 얼른 그 여자 풀어서 넘겨. 셋 셀 동안 해라. 하나.”
“누, 누구야!”
당황한 남자가 침입자를 향해 소리치자 방 안에 서 있던 남자 무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침입자는 여유로운 웃음을 잃지 않았다.
“둘.”
“…….”
낯설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이 자식……!”
“셋.”
“죽여버려!”
“끝, 자, 나를 원망하지 마시라.”
안즈의 눈이 커짐과 동시에 남자와 침입자의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남자들이 몰려들어 침입자를 덮쳤다. 그리고 방 안은 순식간에 격투장이라도 된 것 마냥 주먹과 비명소리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아수라장은, 지금의 안즈에겐 아무 상관도 없었다. 풀려나 자유로워진 팔다리를 겨우겨우 움직여 앉았다.
- 이왕 좋은 조건에서 태어난 것, 평범한 삶을 살아.
안즈의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평범하게 살라고 했는데. 정말 말도 안 듣지.”
어느새 널브러진 남자들을 배경으로 방 한가운데 주저앉아있는 안즈의 앞에 붉은 눈을 휘며 쓸쓸한 웃음을 띤 검은 머리의 남자가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췄다.
“부탁하지 않은 짓 하기 선수권 대회 하면 일등 하겠다, 아가씨.”
7년 전에 죽은 줄만 알았던, 안즈의 소중한 사람.
사쿠마 레이였다.
젠장~~~~~~ 또 완결 안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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