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뭇잎이 떨어진다.
키세는 고개를 들었다. 가을도 아닌데 한여름에 나무에서 나뭇잎이 떨어지다니, 너무 자신의 마음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난다. 떨어진 나뭇잎을 손가락 두 개로 집어든 키세는 천천히 앞뒤로 빙글빙글 돌렸다. 그래도 너는 조금 나을까, 땅에 떨어져 양분이라도 될 수 있으니. 조용히 중얼거린 키세는 나뭇잎을 땅바닥에 버리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다이쨩한테 고백받았어.'
우뚝. 다시 멈추는 발을 내려다보며 키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마음대로 되는 게 없구나.
머리속에서 몇십 몇백번을 계속 맴돌고 있는 한마디의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실제로 자신의 몸도 제어가 되고 있지 않다. 마음은 발걸음을 떼라고 말하고 있는데, 다시 아무도 없는 거리 한가운데서 처량하게 멈춰서버렸다.
농구로는 기적에 세대에 속할 만큼의 수재, 사회적으로도 꽤나 인지도 있는 모델인 자신이 거리 한가운데서 이러고 있는 것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깟 여자의 마음 하나 갖지 못해 실연맞은 3류 소설의 서브남 마냥 추하게 서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현재 자신의 처지였기에 반박할 여지도 찾지 못한다.
아오미네와 모모이는 소꿉친구였다. 그것도 아주 어릴적부터 함께해온,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그런 친밀한 사이. 하지만 모모이의 시야에는 항상 존재감 희미한, 하늘빛 소년이 있었기에 자신도, 아오미네도 이런 상황이 올 것이란 생각은 못 했었고 안 했었을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히 분홍빛 소녀는 하늘빛 소년만을 바라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변했고, 모모이는 자신의 소꿉친구와 친구 이상의 사이가 되었다. 자신은 지금 그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오는 길이었다.
'정말요? 야~ 두사람 계속 답답하게 썸만 타는 것 같더니 드디어? 그것도 아오미넷치가 먼저요? 생각도 못했슴다! 아오미넷치 박력있네여! 축하함다! 모못치도 이제 커플인가~'
'키쨩도 얼른 좋은 여자 만나면 좋을텐데. 인기 많은데 왜 여자친구를 안 만드는 거야? 아까워.'
그야 나는 당신이 좋으니까.
이 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려서, 당신에게 접근조차 못 해봤지만,
그래도 난 당신이 좋으니까.
속에서는 수백번을 외치고 있었지만 겉으로 나오는 것은 형식적인 미소와 꾸며낸 마음 뿐이었다. 이런 말을 들을 줄 알았다면 당신의 전화에 기뻐하지도, 수십번 거울을 보지도 않았을 거야. 늦지 않으려고 급하게 뛰쳐나가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이렇게 속이 울렁거리는 어지러움을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키세는 급작스레 몰려오는 어지러움에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긴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정말 꼴사납다. 입꼬리를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고백도 못해보고 실연당해 길가에서 우는 남자라니, 아마 이게 드라마였으면 자신은 화면 밖에서 실컷 비웃어주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재 그 드라마의 주인공은, 자신이었다.
"기회라도 주지 그랬어요."
입밖으로 소리내 말해보지도 못한 나의 마음이 불쌍하잖아요.
"내가 이길 길은 없다는걸, 알고는 있었어요. 첫번째도, 두번째도."
내가 이길만한 상대를 좋아해주지 그랬어요.
"각오할 시간이라도....주지 그랬어요."
아직 준비가 덜 되어 있었는데.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움직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키세는 계속 그 자세로 서서 못다했던, 할수 없었던, 그러나 하고 싶었던 말들을 쏟아냈다.
어느 누군가에게는 긴장됐고, 어느 누군가에게는 행복했고, 어느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쓰리고 아팠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
2.
벚꽃이 날린다. 아니, 복숭아꽃인가? 아무래도 좋아. 당신을 닮은 꽃이라면.
키세는 분홍색 꽃잎이 날리고 있는 언덕에 서 있었다.
분명 침대에 널부러져 있다가 잠들었을 텐데, 왜 이런 곳에 서 있는 거지. 꿈인걸까. 가만히 생각하며 키세는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갈수록 꽃잎이 많아지고 있다. 손을 뻗어 손바닥을 펼치니 꽃잎 하나가 살포시 내려앉는다.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꽃잎을 쥐고 앞으로 시선을 돌린 키세는 그대로 굳어졌다.
"...모못치."
분홍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조용히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소녀가 보였다. 분명 원하고 또 원했던 그 뒷모습이다. 키세가 조용히 입을 열자 소녀가 천천히 뒤돌았다. 그리고 예쁘게 웃었다.
아아, 꿈이구나.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저 미소를 나에게 보여준다는 건, 이건 역시 꿈이라는 거겠죠.
눈앞의 모모이는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보여주던, 하늘색 소년과 소꿉친구에게만 보여주던 그 예쁜 미소를 짓고 키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역시 잠들어 있는 거구나. 여긴 꿈이구나. 분명히 인식한 키세는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 모모이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키쨩."
모모이가 키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천천히 양팔을 벌렸다. 마치 달려오는 아이를 껴안아주려는 어머니처럼, 그렇게 포근해보이는 품을 키세에게 보여주었다. 키세는 손을 뻗었다.
"모못치."
"응, 키쨩."
조금, 욕심 부려도 될까요. 꿈에서라도, 당신을 안아보고 싶어.
모모이는 여전히 활짝 웃고 있었다. 분홍빛 선명한 그 미소가, 상냥하고 따뜻한 그 미소가 정말 견딜 수가 없어서, 입을 열었다.
"안아봐도, 될까요."
꽃잎이 휘날린다. 이 꽃잎은 벚꽃일까, 복숭아꽃일까. 소년은 계속 생각했다.
소녀의 미소는 여전히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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