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 이즈미의 눈에 거슬리게만 보이는 아라시의 하얀 꼬리는 계속해서 살랑거리며 답을 재촉했다. 깊은 한숨이 목 끝까지 올라오는 것을 꾹꾹 참으며 이즈미는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냥, 예전부터 좀 알았던 녀석. 그것 뿐.”
“그것 뿐?”
“그것 뿐!”
네가 기대하는 그런 거 전혀 없으니까! 나뭇가지에 앉아 나무기둥에 건방지게 기댄 채로 툭툭 말을 뱉는 이즈미를 보던 아라시는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뭐어, 그렇겠지. 사실 딱히 뭘 기대한 건 아니야.”
“죽을래?”
“어머, 상스러운 말.”
“용건 끝나지 않았어? 알다시피 나 너랑은 그다지 얼굴 오래 마주보고 싶지 않거든?”
“음~”
어떨까나? 아라시의 눈매가 휘었다. 그 아이에 대해 어디까지 알아봤는지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 아닐지 가늠해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아직까진 정말 흥미 그 이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아직까진.
“뭐어, 사실 그 아이를 잠깐 만났었거든. 너무 귀여운 여자아이라서 아직도 과거의 집착을 버리지 못한 이즈미 쨩한테는 조금 아깝지 않을까 했었어~”
“아, 그래.”
‘어라?’
이즈미의 눈가가 순간 움찔한 것 같긴 했지만, 예상외의 너무나 건조한 반응. 아라시는 의문을 담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이 뱀은 감정을 숨기는 걸 어려워하는 타입은 아니긴 하지만, 작정하지 않는 이상 어느 정도는 얼굴에 보이는데.
‘작정했나? 아님 진짜?’
그렇게 긴가민가하고 있자니 곧 그런 의문을 가진 아라시를 간파한 듯, 이즈미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라시에게 날아들었다.
“그 녀석, 좋아하는 남자 있거든. 너, 허튼 수작 부려도 소용없을걸.”
“어머?”
“인간 녀석들이 뭘 하든지 나랑은 더더욱 상관없는 이야기고 말이야.”
이즈미가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나뭇잎 쓸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사방에서 이즈미가 부리는 뱀들이 모여들었다.
“난 내가 알고 싶은 건 다 알았거든.”
어서 꺼지라는 간접적 신호.
어지간히 보내고 싶은가 보네. 아라시는 속으로 조용한 웃음을 삼켰다.
‘내가 보기엔, 이미 충분히 상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즈미 쨩~’
본인이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는 짓이지만.
* * *
“……그래서 말이죠, 다 털어놓고 솔직히 조언을 구하는 걸로 마무리가 됐어요. 여자 친구들한테도 말 안했는데, 남자애들한테 먼저 들키다니 기분이 좀 이상하지만, 그래도.”
“…….”
원래 매사 관심 없어하는 사람, 아니, 요괴였지만 오늘은 침묵보단 무시에 가깝다는 기분이 들었다. 안즈는 괜히 고개를 들어봤지만 역시 높이 있는 이즈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지난번에는 내려와 있길래 조금 친해진 건가 싶었는데, 역시 아니었나보다.
“오늘은 다시 올라가 있네요?”
“…그땐 일하느라.”
“일?”
요괴도 일을 하나, 갸웃대봤지만 이즈미는 아무 답도 주지 않는다. 더 물어볼까 했지만 안즈는 이내 생각을 거두었다. 못돼먹은 사람, 아니, 요괴니까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 뻔하지 않은가. 특히 오늘은 왜 심기가 이렇게 불편해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괜히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을 내렸다.
안즈가 입을 다물자 더욱 고요해진 숲은 나뭇잎 바스락 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역시 조용해서 좋구나. 안즈는 눈을 감고 나무둥치에 기댔다. 매번 흙바닥에 앉아야 하니까-항상 신문지라던지 깔고 앉을 것을 가져오긴 하지만-교복 치마가 구겨지고 더러워졌지만, 어차피 여기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괜찮았다.
“……그 애는요, 항상 착하고 상냥해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언젠가부터 신경이 쓰여서. 이게 좋아하는 건가, 했어요. 특별히 나한테만 상냥하다던가, 그랬던 건 아니에요. 모두한테 상냥하고 친절하지만, 그런 게 좋았으니까. 지금도 그렇고.”
이즈미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지만, 그런 건 상관하지 않고 안즈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친구가 학생회라서, 마주칠 일도 많았어요. 음, 이건 좀 행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다들 친해지고 싶어하는 타입일 거예요. 그런 애랑 쉽게 친해질 수 있었으니까, 전 행운아네요.”
“……뭐, 그럴지도 모르겠네.”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이 들려오자 안즈는 눈을 뜨고 다시 한번 고개를 올렸다. 반대편 나무에 앉아있는 이즈미의 옷 소매가 바람에 흔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딱딱하기 그지없는 그 얼굴에 그런 웃음을 짓게 할 수 있는 사람이면.”
곧 안즈의 시야에 이즈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양반다리를 하고 턱을 괸 채로 안즈를 내려다보는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