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럴 수는 없었다. 당장 쌓인 일이 몇 개인데, 이렇게 맥없이 누워있을 수는 없는데.
"......"
- 자업자득인게지.
쯧, 휴대폰 너머에서 혀를 차는 소리에 안즈는 조금 어깨를 움츠렸다. 그야, 그렇죠.. 차마 대답이 되지 못한 울림을 삼키고 다시 귀를 기울이니 이번엔 한숨 소리가 들렸다.
- 일단 기다려. 그 사이에 아무한테나 문 열어주고 그러면 안 된다네, 아가씨?
"애도 아니구요..."
힘없이 대답한 안즈는 웃음소리와 함께 통화가 끊어지는 것을 보고 슬쩍 눈동자를 굴려 침대 옆 달력을 확인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트릭스타의 스케줄이 없는, 정말 간만의 휴일이라는 것.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간만의 휴일에 앓아 누웠다는 것이었다. 물론 휴일이라고 해도 일은 쌓였고, 전혀 쉴 생각이 없었던 것도 맞지만 이렇게 하루만에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될 줄은 몰랐다.
분명 어제 몸살기가 보여서 재빠르게 처치하고 잤는데,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안즈의 몸에 쌓인 피로는 엄청났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걸려온 연인의 전화에 거짓을 말할 수도 없어 솔직히 고백하고 보니 이런 상황. 안즈는 다시한번 달력을 확인했다. 언데드... 언데드도 별 스케줄은 없는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인가.
안즈의 담당은 학창시절 때부터 특별한 인연을 함께해온 트릭스타였지만, 연인이 속한 유닛인 언데드의 스케줄도 남몰래 챙기고 있었다. 뭐, 그 연인, 사쿠마 레이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 몰래라고 하기엔 몰래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지러워......'
끙, 신음을 한번 뱉고 안즈는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는데 몸은 전혀 움직여주질 않는다. 물론 여기서 무리하게 움직였다간 다음날에도 호전되지 않을 것은 당연하고 곧 도착할 레이에게도 엄청나게 혼날 것이기에 손가락을 몇번 꼬물거리다 포기했다.
모처럼, 휴일, 인, 데......
마디마디 끊어진 생각을 마지막으로 안즈의 의식은 끊겼다.
-
"이거 원. 완전히 죽기 직전이구먼."
귓가에서 울리는 소리에 안즈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자 뺨에 뭔가 톡톡 닿았던 뭔가가 사라졌다. 잠이 들었었나 보다. 몽롱한 의식을 차리려 애를 썼다.
누군가 있어..?
안즈가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리자 시야에 엄한 얼굴을 한 레이가 비쳤다. 그러고보니 잠들기 전에 통화한 기억이 났다. 그러나 안즈와 눈이 마주친 레이는 그대로 손을 들어올려 안즈의 시야를 덮어버렸다.
"누가 이렇게 무리하라고 했지, 안즈?"
"...얼굴, 흉하죠?"
안즈는 동문서답을 하며 자신의 눈을 가린 레이의 손을 양손으로 꼭 잡았다. 레이는 분명 화가 났을 테니까 어설프게 변명해봤자 소용이 없을 거고. 아파서 마음까지 약해졌는지, 평소엔 하려고 해도 나오지 않는 어리광이 저절로 나오는 기분이었다.
"그렇구먼. 더 흉해지기 전에 뭐라도 먹여야겠어. 자, 죽. 직접 만든건 아니지만 오는 길에 급하게 사 왔다네? 남김없이 먹어야 칭찬해 줄 테니까 말이야."
"...너무해. 빈말이라도 안 흉하다고 해줘야 하잖아요."
"이 몸은 지금 화가 났으니까 말일세~"
전혀 화나보이지 않는 말투로 능청부리는 레이에게 입을 한번 삐쭉여주곤 안즈는 숟가락을 잡았다. 아직 따끈한걸 보아하니 방금 데운 것 같았다. 집에 온 지 얼마나 지난 걸까? 문득 둘러보니 물수건을 간 흔적 말고는 별다른게 없다. 들어오자마자 식사 준비를 해준 거구나. 정말 상상되지 않는 광경이었지만 병간호를 해주겠다고 나름대로 애써 생각했을 레이를 떠올리니 안즈의 입가에 웃음이 떠돌았다.
"맛있어요."
"음."
레이가 계속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안즈는 정적을 지키며 애써 죽에 시선을 집중했다.
"오면서 조금 생각을 해 봤는데."
"?"
"아가씨가 앓아 누운게 이 몸 탓인 것 같기도 해서 말일세... 조금 사과해야 하나 싶은 기분이 돼버렸다네.."
"네에?"
뜬금없이 튀어나온 레이의 발언에 안즈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레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꽤 진심인 발언이었던 듯 약간 풀이 죽어 있는 표정이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안즈는 말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에 물음표만 띄울 뿐이었다. 그런 안즈의 의문을 느낀 레이의 입이 다시 한번 열렸다.
"흠, 이 몸도 트릭스타도 크리스마스엔 일정이 꽉 차있었으니 말일세... 그런데 그 지옥같았던 일정을 마친 아가씨를 무리하게 끌고가우웁"
"으아악!!!"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든 맥락을 이해한 안즈가 숟가락을 팽개치고 급하게 레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대체, 대체 무슨 말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안즈의 눈에 입을 틀어막힌 레이의 눈이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놀린 거다, 놀린 거야...! 아픈것에 부끄러움까지 더해져 열이 오른 얼굴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아예 영향이 없지는 않았겠다 싶은 것이, 그리고서 바로 또 아침 일찍부터 일하고, 지옥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그러고서 또 한 이틀쯤 철야하고... 그러니까 즉,
"잘 수 있었을 때 못 재워준 내 탓인가 하고~"
"그, 그만 말하라니까요!!"
일부러 말투까지 바꿔 말한다. 팡팡 때려봤지만 그만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레이가 하하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자업자득이란 말은 별로 어울리지 않겠구나~ 하고?"
"아뇨, 맞습니다. 자업자득이란 걸로 해 주세요."
"흠~"
뭐, 그런가. 레이가 여전히 미소가 만개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 주지 뭐. 눈웃음을 지으면서 안즈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치만 확실히 일을 좀 줄이긴 해야겠구먼. 며칠 밤을 샜지? 또 이렇게 쓰러지면 이 몸, 정말 화낼 거니까 말일세? 안즈."
팽개친 숟가락을 안즈의 손에 단단히 쥐어주며 하는 레이의 말에 안즈는 치사하단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도, 별다른 반박도 못한 채 여전히 발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로제님께 드린 글! 능력부족으로 본문에 쓰지 못했지만(...) 미래시점이고 둘은 사귀며 서로 집 비번을 알고 드나드는 사이인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