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15일 (일)에 열리는 제 3회 어나더 스테이지의 신간 샘플 페이지입니다.
신간은 레이안즈 <일월의 랑데부>와 이즈안즈 <바람이 닿는 곳> 의 총 2권입니다.
“음?”
“…….”
의아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들었더니, 웬 여자애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늘의 정체는 우산이었다. 우산? 레이가 우산을 든 손과 여자아이의 얼굴을 번갈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뭐야?”
무슨 의도야? 그보다, 얘 누구? 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인기척 없이 다가올 수가 있는 것인가. 놀람이 섞인 말투에 여자아이가 우물쭈물하는 것이 보였다.
“우산, 없으신 것 같아서요.”
조그만 성량으로 튀어나온 발언은 레이를 어처구니없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레이는 다시 여자애를 살펴보았다. 주말이라 교복은 아니었지만 딱 봐도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 그리고 그 문제의 우산은 이 아이가 들고 있는 것, 딱 하나였다.
“준다고?”
“저는 여기서 뛰어가도 되는 거리라.”
소녀가 어서 받으라는 듯이 우산을 재차 내밀었다. 정말 진심인 듯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가 레이에게 꽂혔다. 하지만 레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웬만한 것에도 이렇게 당황하지 않는데. 그러니까, 정말로 지나가다가 비 맞는 사람이 보여 가엾은 마음에 우산을 기부 받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자 황당해졌다. 분명 그런 걸 바라기는 했는데…… 했는데 말이야.
“어이…… 그렇다고 이걸 나한테 주겠다고? 너, 내 팬이야?”
물론 팬이라기엔 너무 침착한 반응이어서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말 한마디 안했는데 베풀어지는 호의라니. 보통은 안 믿는 게 상책이다. 물론 사쿠마 레이라는 사람은 온갖 사람들에게 호의를 받아 본 적이 질리도록 많았다. 하지만 레이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호의들은 레이가 입을 연 후에 시작된 것들이었다. 외모를 보고 접근해 온 사람이 없다고는 말 못하지만, 보통 길가에 비 맞고 앉아있는 사람이 잘생겼다고 하나밖에 없는 자기 우산을 넘겨주는 사람이 있는가? 뭐, 어딘가에는 있겠지. 하지만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호의에는 반드시 저의가 깔려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사쿠마 레이는, 순수한 호의 따위가 있다고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팬?……은 아니지만요, 조금 헷갈렸는데 예전에 본 분인 것 같아서.”
그런데, 소녀에게서 나온 대답은 상상도 못한 방향이었다. 레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난 너 모르는데?”
그렇게 답했더니, 이름 모를 소녀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가 닫히더니 이내 조그맣게 호를 그리는 것이 보였다.
“제 인상이 흐릿한가 봐요. 하긴, 그 쪽은 무지 예쁘게 생기셨어요.”
“어, 고맙다…… 근데 진짜 내가 그쪽이랑 만난 적이 있어?”
우산보다 그 쪽에 더 신경이 쏠린 레이가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짚었다. 이런 생김새의 여고생을 만난 적이……? 떠오를 듯 말 듯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소녀가 제 손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뭐, 뭐야.”
“저, 얼른 가야 해서…… 드릴게요. 그냥 받으셔도 돼요. 저는 정말로 괜찮거든요.”
“어?”
순식간에 소녀의 손에 들려있던 우산이 레이의 손으로 넘어왔다. 얼떨결에 우산을 받아든 레이가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소녀가 한 박자 빨랐다.
“저번에는 더러운 데 앉아 계시더니 이번에는 비 맞고 계시네요. 얼른 가서 옷 빨고 뽀송한 걸로 갈아입으세요. 꼭이요!”
“어? 잠깐!”
뭐가 저렇게 빠른가. 말을 마친 소녀는 바로 뒤돌아서 뛰어가 버렸다. 아무리 집이 근처라지만, 이 빗발은 맞을만한 건 아니잖아…… 뛰어가는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레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진짜 주고 가 버렸다! 당황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 이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
“싫다고 하셨어요. 병원은 안 간다고.”
“……내가?”
“정신 잃은 와중에도 고집이 세시던데요.”
소녀가 빙긋 웃었다. 레이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병원은 꼭 가보세요. 쓰러지면서 머리 부딪히신 것 같던데 혹시 이상이라도 있으면 큰일이잖아요.”
“아, 어…… 그래.”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네. 레이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소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우연히 지나가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얼마 뒤 그 모르는 사람이 비를 맞고 있는 걸 발견해서 우산을 주고, 또 며칠 뒤에는 지나가던 길에 그 모르는 사람이 쓰러지는 걸 발견해서 급히 응급처치를 해 주고? 말도 안 된다.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하지만 레이의 눈앞에서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일어나고 있는 소녀는 그 말도 안 되는 일의 산증인이었다.
‘혹시, 우연이 아니고 스토커인가? 사실 내 팬인데 아닌 척 하고 접근하는, 뭐 그런 거?’
그런데 그렇다기에는 너무 지나치게 쿨했다. 자신이 그런 의도를 읽지 못할 사람도 아니었고.
“……가게?”
그래서일까. 왠지 붙잡는 듯한 말을 저도 모르게 던져버린 건. 섭섭한 티가 역력하게 배어있는 어투에 소녀가 치마를 털던 손을 멈추고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레이에게 시선을 내렸다.
“늦으면 걱정하시거든요.”
“아…… 어, 음. 그렇겠네.”
그렇지. 보통 집은 고등학생 딸이 연락 없이 귀가가 늦어지면 걱정하기 마련이겠지.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른다. 그대로 벽에 기댄 레이가 여전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눈에 시선을 맞췄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그 옷깃이 오늘로 확실하게 닿았으니 이름 정도야 알아둬도 문제없겠지. 레이의 입이 열렸다.
“난 사쿠마 레이.”
“…….”
소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뜬금없이 이름을 알려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런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레이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아가씨는 이름이?”
색다른 호칭에 놀란 모양이었다. 소녀의 눈이 깜박거렸다.
“……안즈예요.”
그리고 잠시 후 이어진 대답에 레이는 벽에 기댄 자세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안즈, 안즈라.
“좋은 이름이잖냐. 잘 어울려.”
또 어디선가 만난다면 그 땐 이름으로 불러줄 테니까, 다시 나타나.
“안 해.”
“왜!”
이즈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무슨 헛소리를 하나 했더니…… 갑자기 터져 나온 큰 소리에 대기실 이곳저곳에 흩어져 개인 용무를 보던 멤버들이 놀라 돌아보는 것은 물론이요, 푹 자던 리츠까지 눈을 가늘게 떴지만 거기까지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무슨 일이야?”
“뭡니까, 선배들?”
열심히 SNS를 하던 아라시와 구석에서 하던 통화를 마친 츠카사가 이즈미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큰 소리의 장본인인 레오에게로 옮겼다. 시선을 받은 레오는 용납할 수 없다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다시 소리치기 시작했다.
“오옷, 나루, 스오! 들어봐! 세나는 바보 멍청이야, 멍청이! 저런 바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나는 믿기지가 않아! 어, 아닌가? 나는 천재지만 바보이기도 하니까 으음, 으~음?”
“하아……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아직도 무슨 일인지 처음부터 요점만 말해 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leader…….”
“이즈미 쨩?”
산만한 대답에 한숨짓는 츠카사를 바라보며 안쓰럽게 웃은 아라시가 이즈미를 불렀다. 레오의 입을 통해 듣는 것보다 이즈미에게 직접 듣는 것이 빠를 거라고 판단한 탓이었다. 상황을 설명하라는 무언의 눈짓에 거울 앞에 앉아 헤어 체크를 하고 있던 이즈미는 싫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런 게 아라시에게 먹힐 리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기에 한숨을 쉬면서도 순순히 입을 열었다.
“내 연애사정이 왜 그렇게 중요한데?”
“아하, 안즈 쨩 얘기였구나.”
“누님 말입니까?”
‘안즈’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츠카사의 몸이 빠르게 다가왔다. 뭐야, 저 반응 속도. 이즈미의 표정이 어이없게 변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Trouble인 겁니까?! 누님을 울려버리신 겁니까?!”
“아무도 그런 말 안했잖아!”
“하지만 그 이외에 세나 선배가 연애 문제로 고민하실 일은 없는 것 같은데요?”
이걸 확 그냥…… 이즈미는 목 끝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키고 조용히 츠카사를 노려봐 주었다. 하여튼, 학창 시절부터 안즈라면 먹던 과자도 양보해 줄 녀석이었으니 이런 반응이 새롭지도 않지만 너무 한결같은 것도 좀 짜증이려나. 그렇게 조용해진 이즈미를 본 아라시가 곤란한 듯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속앓이하게 하진 마. 안 그래도 혼자 꽁꽁 숨기는 앤데.”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리고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줄래?”
“흥, 그러다가 10년은 더 걸리겠다.”
이번에는 대단히 뾰로통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골난 표정으로 멤버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레오였다. 무언가 적던 펜을 쭉 내민 입술 위에 올려놓고 한껏 삐친 기운을 풍기고 있는 레오를 본 이즈미는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왜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 고집불통 막무가내 상태를 보아하니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볶일 미래가 훤하다.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며 관자놀이를 몇 번 꾹꾹 눌렀다.
“아무튼, 생각 없어. 적어도 향후 5년간은……”
“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 소리가 튀어나왔다.
“고집 부려도 소용없다니까!”
“하지만 안즈는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뚝, 이즈미가 움직임을 멈췄다. 어느새 레오의 손 안으로 위치를 바꿔 압력을 받고 있는 펜이 불만스럽게 딸깍댔다. 그리고 여전히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아라시와 츠카사는 이즈미에게 시선을 고정할 뿐이었다. 뭘 기다려? 둘의 눈빛이 물음표로 물들었다.
“……시끄러워.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야.”
*** 이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
“있잖아? 가장 제일 가까운 시일 내에 할 수 있는 사람.”
“으응?”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들을 마주한 호쿠토는 곧 뭘 모른 척 하냐는 듯 안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 중에 가장 빠르게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너잖아, 안즈.”
“아, 음…….”
그렇긴 하지. 이 안에서 유일하게 애인이 있는 처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안즈가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딱히 이즈미와의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이상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요즘엔 더 늦게들 한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나이도 충분하고.
“어이, 이거 혹시 건드리면 안 되는 영역이었던 거 아냐?”
“왜? 맞는 말인데. 안즈, 미역머리 선배랑 잘 지내잖아? 그치?”
“응, 뭐…… 나쁜 사이는 아니지…….”
나쁘긴 커녕 간만에 꾸몄다고 외출하기 전에 사진도 주고받은 참인데. 굳이 거기까지 말할 필요는 없으니 안즈는 그대로 어설프게 시선을 피했다. 아직 결혼에 대한 깊은 대화를 한 적이 없다고 어떻게 말해야 하나.
“혹시, 이즈미 씨가 결혼하기 싫대?”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마코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무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변한 얼굴이 보여 안즈는 아차 싶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즈미를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인 만큼 쓸데없는 걱정은 끼치지 말아야 하는데.
“아, 아니, 그런 건……”
그래서 서둘러 대답하려니, 또 할 말이 없어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싫어할까? 이즈미 씨, 사실 결혼 같은 거 별로 안 내켜하는 걸까? 그렇지, 결혼은 주말에 잠깐 가서 자고 오는 정도의 생활이 아니니까…… 싫어할까? 혹시 나를 위해서도 있지만 본인도 싫은 걸까? 얘기를 해 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말을 잇다가 우물쭈물하며 끝맺지 못하는 안즈를 본 트릭스타 넷의 얼굴이 걱정스럽게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뭐야! 미역머리 선배, 안즈랑 결혼하기 싫다고 했어?!”
“어? 아니, 아니, 그러니까!”
“하긴, 연애중이라고 발표한 지도 이제 1년 다 되어가니 벌써 결혼은 좀 부담스럽긴 하겠지? 따질 것도 많을 테고.”
“음, 그런가. 미안하다, 안즈. 괜한 얘기를 했어. 상처받았을 텐데.”
“안즈 쨩…….”
큰일 났다. 완전히 오해 사 버렸다. 안즈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하지도 않은 말로 이즈미의 이미지를 실추시킬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냐! 아냐, 그런 말 안 했어. 그저, 그게……”
“으응……?”
왠지 모르게 비통한 표정으로 변한 마코토가 의문을 표했다.
“그런 거 아니고, 이즈미 씨가 나랑 결혼하기 싫다고 했다거나, 그런 적은 전혀 없어, 걱정하지 마! 그냥, 그……”
“그……?”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해명 끝에 안즈가 또다시 말을 얼버무리자 의아한 시선들이 꽂혔다. 도대체 뭘 그렇게 얘기하기 어려워하냐는 표정에 안즈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며 말을 이었다.
“……아직, 그런 얘기를 안 해본 것뿐이야…….”
얘기를 안 한건 사실이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안 했다고?”
예상대로 놀람이 담긴 의문들이 쏟아졌다. 그렇게 길게 연애했는데 정말 한 번도, 넌지시라도 결혼 얘기를 해 본 적이 없다고? 세나 선배 되게 그런 거 확실하게 할 것 같았는데 엄청 의외네? 뭐야, 그럼 안즈도 결혼하려면 아직 한참 먼 거야? 얼른 반짝반짝한 안즈가 보고 싶었는데~. 등의 말들이 이어지는 사이에서 안즈는 그저 멋쩍게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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